정주원

2018558024

이름의 상실

언젠가 이름을 상실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름을 잃지는 않았지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을 정립하지 못했었다는 말이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시발점이라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계속 쌓여져오고 있던 것에 대한 분출이랄까. 분에 맞지 않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일 때 쯤, 나는 내게 붙여진 무수한 이름과 수식어들을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를 가르키는 수많은 이름들이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20대에 흔히들 겪는 감정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지나고 나면 다 아무 일도 아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언을 얻고자 해서 읽었던 책에서조차 나의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으며, 나는 도무지 이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자꾸만 과거에 대한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 과거와 다른 모습을 가진 나의 모습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과거의 이름을 가진 나는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는데. 아니, 애초에 확신이 있긴 했던가, 내가 과거에 가졌던 그 이름들과 수식어들에 숨어서 진짜 나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것을 잃어버린 무의 상태가 되는 것만 같았다. 무에서 다시 유를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듯이 다시 내게 걸 맞는 이름을 찾는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름을 상실한 내게는 무언가의 변환점이 필요했다.   이름을 상실해 버린 것들. 즉,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물, 형태,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이름의 상실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름이라는 보편적인 틀에서 벗어나 이질적이게 위치해 있는 것, 점점 의미와 형태를 잃어가는 것, 그리고 이름이나 수식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것들을 계속 마주하며 촬영하였다. 사물, 형태, 자연을 반복적으로 촬영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그들은 부여된 이름이나 수식어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해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그것이 이름에 묶인 한정된 일종으로 보았다면 이제는 그 안에 존재한 유연한 본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이 결정하는 나의 가치. 이젠 이름의 상실은 더 이상 내게 중요치 않았다. 결국 자신에게 걸 맞는 이름은 없다. 나를 결정해주는 것은 어떠한 형태의 이름이나 수식어 따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